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푸른색의 슬픈 꿈 '비몽'

파란버스 2009. 2. 11. 01:15

 

 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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꿈과 현실로

하나가 되어버린 남녀가 있다.

 

실연의 아픔을 꿈으로 달래는 '진'(오다기리 죠 扮)과

진이 꾸는 꿈대로

몽유병 상태에서

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헤어진 옛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'란'(이나영 扮).

 

어느 날 밤의 교통사고를 계기로

그들은 한 사람처럼 같은 운명의 끈으로 엮이게 되지만,

꿈에서라도 여전히 사랑하는 과거의 연인을 만나 '진'이 행복해지면

마주치기조차 싫은 옛 애인에게 안겨버린 현실로 인해 

'란'은 불행해진다.

 

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힘든,

이 비현실적이고도 불가사의한 일들은

우울한 듯 깊게 가라앉아 있는 푸른 톤의 화면들로 이야기를 열어가며

몽환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.

 

그들.jpg

 

<비몽>은 색(色)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영화다.

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유와 상징뿐만 아니라

정도는 좀 약해졌어도

종종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 자학적이면서도 잔혹한 장면들 역시 여전하지만,

이 영화가 인상적으로 마음에 들어오는 이유는

감독의 다른 영화인 <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>을 보았을 때와 같은

탁월한 영상미 때문이다.

 

두_사람.jpg

  

목(木)도장을 새기는 남자 '진'이 직접 슬플 비悲와 꿈 몽夢 字를 새겨 종이에 찍는 모습으로 등장하는

푸르스름한 화면 속의 <비몽> 타이틀도 인상적이고,

꿈과 현실,

사랑과 증오,

미련과 냉담,

기쁨과 슬픔,

행과 불행,

같은 선상에 서 있지만

어쩔 수 없이 반대를 이루는 '진'과 '란'의 대조적 정서는

영화 초반 흑과 백이라는 의상 대비로 시각적 효과를 더한다.

 

조명.jpg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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직업도 독특한,

전각을 새기는 남자 '진'과 전통 의상을 만드는 여자 '란'의 집은

가회동 한옥 마을을 배경으로 운치를 더하며,

사각거림이 느껴지는 고운 색의 한복과 더불어

불상이나 부처의 손 모양인 문손잡이 등 종교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품들과

한옥에 설치되어있는 자동문과 번호 키 등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있는 모습들은

시각적으로 영화 보는 재미와 신선함을 배가시킨다.

 

미려한 색과 공간, 효과적인 조명 연출 등으로

김기덕 감독은 회화를 공부한 사람답게

영화를 통해 아름다운 화면과 구도로서 세심하게 신경 쓴 미장센을 선사하므로,

<비몽>은 오다기리 죠와 이나영이라는 스타 배우들의 출연 영화로서거나,

그 안에 담겨있는 철학적 은유와 의미를 곱씹으며 음미하기 보다는

적절히 배치된 색과 공간미가 돋보이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.

 

영화 속 정신과 의사(장미희 扮)가 흑과 백은 동색이라고 처방(?)을 내린 것처럼,

마침내 꿈과 현실은 하나가 되고

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.

동시에 어둡게 침잠돼있던 푸른 톤의 슬픔은

어느새 다른 색의 옷을 입고 높이 날아오른다..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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